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지브 간디 (문단 편집) === 스리랑카 내전 개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스리랑카 내전, 앵커=인도의 개입)] ||[[파일:external/thuppahi.files.wordpress.com/f6-ipkf-troops-on-guard.jpg|height=300]]||[[파일:external/www.sangam.org/NewsweekNov91987sarongclad.jpg|height=300]]|| ||전투 중인 인도 평화유지군(IPKF). ||주위를 둘러보는 LTTE 대원의 모습. || 외교 면을 보자면 강한 인도를 추구하며 타국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표적으로 [[세이셸]]에서 레네 대통령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간디 총리는 바로 군대를 파견해 이를 제압했고, 1988년에 [[몰디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1,500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견해 쿠데타를 제압했다. 다만 파키스탄과는 1987년 심라 협정 재이행을 확인하는 등 딱히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7년 2월에는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가 [[델리]]를 국빈방문하기도 했다. 라지브 간디 총리가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외교 사건은 '''[[스리랑카 내전]]''' 때였다. 당시 [[스리랑카]]는 북부 타밀 주에 사는 [[타밀족]]들이 허구한 날 독립을 요구하며 분리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인도 내 분리주의 세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했던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에 대놓고 개입할 것을 시사했다. 당시 스리랑카는 주류인 [[싱할라족]]과 북부에 모여사는 [[타밀족]] 간에 민족갈등으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싱할라족은 북부에서 유입된 아리아인들과 스리랑카 토착 베다인들의 혼혈이었고 타밀족은 인도 남부에서 건너온 민족이었다. 그러나 싱할라족이 스리랑카의 주권을 잡으면서 이에 반발한 타밀인들이 대놓고 정부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와 타밀의 내전이 격화되자 인도 역시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인도 남부에도 역시 타밀족들이 대거 살고 있었고, 인도 타밀족들은 안그래도 북인도 중심 정책에 불만이 많던 터라 스리랑카 내전이 격화되면 언제든지 인도에까지 불이 옮겨붙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그와중에 타밀족은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를 결성해 무장단체를 세우고 본격적 전쟁을 벌였다. 결국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을 중재하기 위해 1987년 인도 평화유지군(IPKF)을 파병하게 된다. 이후 스리랑카 북동부에 [[인도군]] 주둔, LTTE의 무장해제, 스리랑카의 [[타밀어]] 공용어 지정 등을 골자로 하는 인도-스리랑카 조약이 맺어지며 잠시 평화를 찾는 듯 보였다. 처음에는 LTTE도 인도의 무장해제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 싶었지만 결국 끝끝내 무장해제를 거부하자 이젠 인도 평화유지군과 LTTE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도군은 '평화유지'라는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스리랑카 현지에서 '''온갖 약탈과 강간을 일삼으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고, LTTE와의 교착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진흙탕으로 변해버린다. 결과적으로 인도의 스리랑카 분쟁 해소는 완전히 물 건너가버린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인도는 인도-스리랑카 조약에서 따낸 교전권과 전작권을 스리랑카에 넘겨주면서까지 LTTE와 전쟁을 벌였지만 [[게릴라]] 전법을 쓰는 LTTE를 완전히 제압하긴 무리였다.[* 물론 인도가 국제 이미지 따윈 신경쓰지 않고 밀여붙였다면 LTTE가 졌을 것이다. 스리랑카는 섬나라라 [[아프가니스탄]]처럼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스리랑카인들의 여론도 점점 악화되었고, 인도 내에서도 '인도판 [[베트남 전쟁]]'을 만들고 싶냐는 비난이 커졌지만 라지브 간디는 끝끝내 철군을 거부했다. 인도군은 1989년 총선에서 라지브 간디 총리가 쫒겨난 뒤에야 스리랑카에서 철군한다. 여담이지만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 내전 개입 과정에서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직접 스리랑카 대통령과 인도-스리랑카 조약을 맺기 위해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그런데 조약 체결 바로 다음날인 1987년 7월 30일에 라지브 간디가 [[콜롬보]]의 대통령궁에서 호위병들을 시찰하는 중에 스리랑카 수병들 중 하나가 라지브 간디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것. 천만다행으로 라지브 간디 총리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간신히 총탄을 피해서 살아남았다. 해당 수병은 바로 옆 호위병들에게 끌려갔고 총리 암살미수로 약 2년 반 동안 투옥됐다. 참고로 라지브 간디 총리가 암살 시도를 당한 것은 이번 뿐만 아니라 1985년과 1986년에 걸쳐 세 번이나 더 있었다. 한 번은 1985년에 시크교도 2명이 몰래 나무 위에 숨어 라지브 간디를 죽이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986년에도 시크교도들이 2번 씩이나 각각 라지브 간디를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